논문 Figure에 관하여: (1) 원리와 원칙

Figure가 중요한 이유

대부분의 연구, 특히 AI 연구는 결국 논문 작성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꼽으라면, 대부분은 주저 없이 ‘글쓰기(writing)’를 떠올릴 것이다. 내 연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 메시지를 동료 연구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지는 결국 문장과 구조의 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Figure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처럼 취급되곤 한다. “Writing vs Figure 중 하나만 고르라면 글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AI 연구 환경을 생각해 보면, Figure의 가치는 다시 평가될 필요가 있다. 하루에도 수백 편의 논문이 업로드되고, 국제 탑티어 학회에는 3개월에 한 번씩 3만 개가 넘는 논문이 제출된다. 비슷한 키워드,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논문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상황에서, 심사위원과 독자는 모든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수 없다. 인간은 텍스트보다 시각 정보를 훨씬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한다. 결국 “대(大) 논문 시대”에는 논문의 핵심을 단번에 잡아주는 Figure가, 독자의 관심을 붙잡는 첫 관문이 될 수밖에 없다.

Figure는 흔히 말하는 “논문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시선을 끌기 위한 장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로 표현하면 장황해질 내용을 한 번에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강력한 도구다. 논문의 기여, 전체 모델 구조 등의 메시지 등은 잘 설계된 Figure 하나로 훨씬 선명하게 전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가 Figure 제작을 고통스러운 업무로 느낀다. 텍스트 기반의 Writing과 달리, Figure를 만들려면 별도의 툴을 익혀야 하고, 어딘가 ‘미적 감각’이 필요한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Writing도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다! 다만 Figure 그리기는 다소 고통의 종류가 다를 뿐.) 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연구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번거로운 작업, 혹은 부가 옵션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Figure는 연구 과정에서 처음 맡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학부 연구생들에게 흔히 주어지는 첫 미션이 바로 “이 실험 결과 / 모델 구조를 Figure로 그려주세요”이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연구자들은 Writing, 실험 설계·조정, 프로젝트 방향성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Figure 작업이 “후배에게 넘길 수 있는 일”로 취급되기 쉽다.

그 과정도 대개 비슷하다. “연구실 선배 누구누구가 만든 PPT 줄 테니까, 그거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 봐~”라는 식이다. 공식적인 교육이나 피드백 없이, 기존에 돌아다니던 슬라이드와 논문 Figure를 흉내 내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혹은 선배가 만든 PPT의 여러 도형을 이리 저리 끼워 맞추는 식으로 시작한다. 파워포인트 기본 도형, 임의로 고른 색 조합, 대충 맞춘 정렬과 폰트 크기로 끼워 맞추다 보면, 일단 논문에서 한 번 쯤 봤을 법 한 무언가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초반에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모니터 옆을 지나가던 선배가 “오, 이거 예쁘다” 라고 하면, 그게 곧 바로 논문에 PDF로 들어가버린다.

이렇다 보니 많은 연구자가 개인의 취향과 막연한 미적 감각에만 의존해 Figure를 그린다. 전문적인 정보 시각화 경험이 없다 보니, 이미 출판된 논문의 Figure를 따라 그리거나, PPT의 기본 도형을 약간 수정해서 쓰는 일이 반복된다. 교수님과 박사님들께 결과물은 항상 어딘가 아쉽다. 정렬이 어긋나 있고, 색이 너무 많거나 대비가 약하고, 텍스트는 작아서 잘 안 보이고, 복잡한 구조는 한눈에 안 들어온다. 이런 피드백을 여러 번 듣다 보면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라고 위축되거나, “이건 미대생이나 디자이너가 할 일이지 연구자가 할 일은 아니야”라며 스스로 선을 긋게 된다.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 보자. “좋은 Figure란 도대체 무엇인가?” 디자인 전공자에게 실험 결과와 모델 구조를 설명해 주면, 그 사람이 바로 논문에 들어갈 완벽한 Figure를 만들어 줄까? 많은 사람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논문의 Figure는 연구자의 개인적인 사상을 주입하거나 예술혼을 뽐내는 작품이 아니다. 단언컨대 Figure는 연구 내용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공학적 산물이자, 예술(Art)이 아닌 철저한 공학(Engineering)이자 인지과학의 영역**이다.

  •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메시지)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 독자가 어떤 순서로 무엇을 보게 될지(시선 동선)를 설계해야 한다.
  • 사람의 뇌가 색·형태·공간 배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인지 메커니즘)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하고 ‘예뻐 보이는’ 그림도 결국 실패한 Figure가 된다. Figure의 성공 기준은 “예쁘다”가 아니라 “한 번 보고도 핵심을 이해하게 만든다”에 있다.

나는 AI 연구자 중에서는 특이하게, 다양한 인포그래픽과 시각화 디자인 작업을 병행해 온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은 논문을 쓰는 과정, 특히 Figure를 설계하고 다듬는 과정, 에서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취향이 맞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이론과 정보 시각화 원칙을 바탕으로 Figure를 설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연구의 가치를 높이는 논문 Figure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관련된 이론과 기본 원칙들을 정리한다. 왜 Figure가 공학이어야 하는지, 인간이 시각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떤 요소들이 Figure의 가독성과 설득력을 좌우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실제 논문 예시를 바탕으로,

  • 좋은 Figure를 단계적으로 설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
  • 연구실에서 흔히 나오는 “해서는 안 되는 Figure”의 전형적인 패턴들,
  • 그리고 초보 연구자가 Figure를 떠맡았을 때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전 팁

을 함께 다뤄 보려고 한다.

“좋은 Figure”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좋은 Figure란 무엇인가? 색감이 예쁘고 화려한 3D 효과가 들어간 그림일까? 학부 시절 포스터, 웹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물을 제작하며 깨달은 점이 있다. 처음에는 “보기에 예쁜 것”에 집중했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어떻게 해야 예쁜 디자인에 정보를 잘 녹여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HCI에서 다루는 배운 디자인의 차원을 요약하면 크게 심미성과 기능성으로 나눌 수 있다.

  • 심미성 (Aesthetic)은 소위 말하는 ‘예쁜 것’으로, 있으면 좋은 “+@”의 영역이다.
  • 기능성 (Functional)은 정보가 ‘잘 정돈된 것’으로, 없으면 안 되는 기본의 영역이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는 좋은 Figure의 정의를 심미성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논문 Figure의 본질은 철저히 기능성에 있다. 아무리 화려해도 독자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1초라도 고민한다면 실패한 디자인이다. 반면 투박한 흑백 도형이라도 연구의 핵심 로직이 즉시 이해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Figure다.

Figure는 연구와 독자를 잇는 ‘인터페이스’다. 여기서 HCI와 인지과학의 개념이 필요하다. 인간이 시각 정보를 어떻게 인지하고 처리하는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사용자가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버튼은 누를 수 있게 생겨야 하고, 경고는 빨간색이어야 한다. 사용자가 “결제 버튼이 어디 있지?”라고 찾는 순간 서비스 이탈이 발생한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리뷰어가 Figure를 보고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면, 사용자 경험(UX)이 나쁜 앱과 같다.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Figure가 나쁘면 리뷰어는 무의식적인 인지 부하를 느끼게 되고, 이는 논문 전체의 인상을 떨어뜨린다.

즉, “좋은 Figure”란 독자의 인지 부하(Cognitive Load)를 최소화하여, 뇌가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정보를 자동으로 처리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이는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뇌 작동 방식을 역이용하는 ‘전략’의 영역이다.

좋은 Figure를 만드는 원칙

설계: 메시지 결정하기

툴은 크게 상관없다. Adobe 툴이나 Figma도 좋지만, PowerPoint로도 충분하다. (Google Slide보다는 기능이 풍부한 MS PowerPoint를 추천한다.) 툴을 켜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설계’다. 빈 캔버스를 띄워놓고 “어떻게 그리지?”를 고민하면 늦다. How(어떻게)보다 What(무엇을)이 먼저다. 코딩 전 아키텍처를 구상하듯 Figure도 설계도가 필요하다.

정보의 성격 파악하기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고 본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두 개중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 지를 먼저 판단하고, 어떤 정보를 골라 표시해야하는 지를 정해야 한다. Figure의 핵심은 모든 정보를 다 전달하지 않는 것에 있다.

텍스트만으로는 유추 불가능한 정보 수치를 정량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그래프는 "텍스트만으로는 유추 불가능한 정보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또한, 각 그래프는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것이 좋다. 가령 위의 그래프에서 왼쪽과 중앙은 언뜻보면 하나의 그래프로도 나타낼 수 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3D Plot으로 가능하지만, 그렇게 시각화했을 때는 두 개의 정보 중 어느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실험 결과, 데이터 분포, 정량적 추이를 보여주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A가 증가할 때 B는 급격히 감소한다”는 문장보다 그래프 하나가 그 ‘급격함’을 더 잘 보여준다.
  • 하나의 Figure는 하나의 메시지만 담아야 한다. 성격이 다른 정보는 과감히 분리해야 한다.
  • 메시지 전달에 방해되는 디테일은 과감히 쳐내고, 상세한 값은 부록의 Table로 보내는 것이 좋다.
  • 만약 한 그래프에 나타내고자 하는 데이터 샘플이 1,000개가 넘는다면, 중요한 것은 개별 값이 아니라 전반적인 경향성 혹은 특정 부분의 변화 일 것이다. 하나 하나의 값을 정확히 표기하려는 것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

텍스트로 유추 가능하거나 개념적인 정보 image-1764569596303.png

  • 모델의 구조(Architecture)나 핵심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경우가 여기 속한다.
  • 핵심은 ‘추상화(Abstraction)’다. 모든 연산 과정을 그릴 필요는 없다. 수식이나 Appendix에 맡겨라.
  • 이 Figure의 목적은 본문을 읽지 않고도 “아, 이런 흐름이구나”라고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덩어리 위주로 과감하게 생략해야 한다.

최적의 그릇(Format) 선택하기

메시지를 정했다면 그것을 가장 잘 담을 그릇을 골라야 한다. 유사한 연구들이 어떤 형식을 썼는지 참고하는 것이 좋다. 변화와 추이는 Line Plot, 비교와 우위는 Bar Chart, 구조와 흐름은 Block Diagram, 결과물의 품질은 시각화 이미지를 활용한다. 잘못된 Format의 사용은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하이.


배치와 구조: 게슈탈트 원리 (Gestalt Principles)

메시지를 정했다면, 이제 배치의 문제다. 경험이 부족하다면 반드시 흑백과 사각형만으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굳이 PPT부터 켜는 것 보다는, 일단 펜이나 태블릿으로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좋다. 색상과 스타일은 나중 문제다. 오직 박스와 선, 그리고 배치(Layout)만으로 정보의 흐름이 읽혀야 한다. 인간의 시각 시스템은 색보다 먼저 형태와 위치를 통해 구조를 파악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게슈탈트 원리(Gestalt Principles)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은 개별 요소 하나하나를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전체적 구조로 조직화해서 지각한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대표적으로 근접성, 유사성, 연속성, 폐쇄성 같은 법칙들이 있는데, 이는 시각 정보를 어떻게 묶고, 어떤 것을 함께 보고, 어떤 것을 구분해서 보는지에 대한 경험적 규칙들이다.

출처: https://uxplanet.org/gestalt-theory-for-efficient-ux-principle-of-similarity-827c20c175f5

이 원리들은 이미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검증되고 활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뉴스 페이지 지면의 레이아웃을 잡을 때, 근접성과 유사성을 이용해 기사 블록을 나누고, 중요한 제목과 부차적인 설명을 시각적으로 구분한다. UI/UX 디자인에서는 버튼·레이블·패널을 배치할 때, 사용자가 메뉴 구조를 “눈으로 한 번에”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게슈탈트 원리를 시스템적으로 적용한다. 정보 시각화와 데이터 대시보드에서도 비슷하다. 차트의 색, 간격, 그룹 박스, 범례의 구조를 설계할 때, 사용자가 숫자보다 먼저 “패턴과 그룹”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논문 Figure 역시 예외가 아니다. 복잡한 수식과 텍스트 설명이 아무리 정교해도, 독자는 먼저 도식과 그림에서 무엇이 함께 묶여 있고, 무엇이 떨어져 있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단계인지를 시각적으로 먼저 읽어내려 한다. 이 순간 작동하는 것이 바로 게슈탈트 원리다. Figure는 결국 연구 아이디어의 요약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에, 다른 디자인 분야에서 이미 검증된 지각의 조직화 원리를 그대로 가져와 쓰는 편이 합리적이다.

아래에서는 그 중에서도 논문 Figure에서 특히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쓰이는 세 가지 원리, (1) 근접성, (2) 유사성, (3) 연속성에 집중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근접성 (Proximity)

인간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요소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서 인식한다. 반대로 멀리 떨어진 요소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복잡한 모델 아키텍처를 그릴 때 이 원칙은 매우 유용하다. 예를 들어, Transformer 내부의 ‘Multi-Head Attention’과 ‘Add & Norm’ 레이어는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물리적으로도 바짝 붙여야 한다. 반면, Encoder 블록과 Decoder 블록 사이는 확실한 여백(White Space)을 두어 구분해야 한다.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정보의 경계를 나누는 가장 강력한 선이다.

유사성 (Similarity)

색상, 모양, 크기, 질감 등이 유사한 요소들은 같은 기능이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독자에게 ‘시각적 규칙’을 학습시키는 과정이다.

만약 첫 번째 그림에서 입력 데이터를 ‘회색 정사각형’으로 표현했다면, 마지막 그림까지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 또한, 모델 내부의 Convolution Layer를 파란색 직사각형으로 그렸다면, 모든 Convolution Layer는 똑같은 파란색 직사각형이어야 한다. 만약 크기나 색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이건 다른 기능을 하는 레이어인가?”라고 의심하며 인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특히, 색상은 사용자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색상이다. 이는 아래 섹션의 “시각적 인코딩”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될 예정이다.

연속성 (Continuity)

인간의 시선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부드러운 흐름을 따라가려는 관성이 있다. 끊어지거나 꺾인 선보다는 직선이나 완만한 곡선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한다. 화살표는 꼭 필요한 요소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에 화살표를 쓸 수는 없다. 화살표가 없어도 모든 요소가 어떻게 이어지는 지 파악할 수 있다면 최고다.

게슈탈트 이론의 내용은 아니나, 사람의 시선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텍스트를 읽는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 혹은 ‘위에서 아래’다. 연구의 파이프라인 역시 이 자연스러운 시선 흐름을 따라 배치되어야 한다. 공간이 부족하다고 해서 흐름을 ‘ㄹ’자나 ‘Z’자 형태로 억지로 꺾거나, 화살표를 역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독자의 시선 처리를 방해하는 최악의 수다. 화살표가 없어도 배치를 통해 순서를 알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 사람의 눈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으로 움직인다.
  • 해당 Figure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 Figure의 Attention Layer > attention map의 구조 > 오른쪽 Figure” 순으로 보게 될 것이다.
  • 이 흐름을 통해, 독자들은 Attention map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오른쪽의 시각화 정보를 더 쉽게 이해하거나, 혹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디로 돌아가서 가시 구조와 관련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지 알게 된다.

시각적 인코딩: 색과 모양의 전략

뼈대를 세웠다면 이제 옷을 입힐 차례다. 여기서 ‘옷’이란 색상(Color)모양(Shape)을 의미한다. 이 두 요소는 단순히 그림을 예쁘게 만드는 것을 넘어,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도구다. 색상과 모양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전문적인 인상을 주는 Figure를 완성할 수 있다.

색상 (Color)과 관련하여,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별다른 전략 없이 “보기 좋은 색상 팔레트”를 무턱대고 가져다 쓰는 것이다. Figure에서 색은 장식이 아니다. 데이터의 성격을 대변하는 시각적 언어다. 색상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 정보의 성격(범주 vs 위계)을 구분한다.
    • 데이터 시각화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대상을 구분할 때는 색조(Hue)를 사용해야 한다.
    • 예를 들어 우리 모델(Ours)과 비교 모델(Baseline)은 빨강과 파랑처럼 색조가 달라야 한다.
    • 반면, Attention Score나 레이어의 깊이처럼 강도나 순서가 중요한 정보는 절대 색조를 섞지 말고, 채도(Saturation)명도(Value)만으로 표현해야 한다.
  • 시선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 모든 요소에 화려한 색을 입히면 독자는 어디를 먼저 봐야 할지 모른다.
    •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에만 ‘메인 컬러’를 부여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요소들은 무채색(회색조)으로 눌러주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독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으로 쏠리게 된다.

해당 Figure는 파란색은 text, 빨간색은 이미지, 노란색은 모델과 관련된 모듈이라는 규칙을 세웠다. 모델 구조 내에서 "서로 다른 정보 = 다른 색조"를 사용하여, 정보가 좀 더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빨강과 파랑을 합치면 보라색이 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두 모달리티가 섞이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양 (Shape) 또한 색상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여기서 모양이란 도형의 형태뿐만 아니라 테두리의 굵기(Stroke width), 모서리의 둥근 정도(Corner radius), 점선과 실선의 구분 등 미세한 기하학적 특징을 모두 포함한다. 모양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 색상의 부담을 줄여준다.
    • 모든 정보를 색으로만 구분하려 하면 그림이 알록달록해져 촌스럽고 가독성이 낮아지기 쉽다. 이때 모양을 활용하면 색상을 아낄 수 있다.
    • 예를 들어, 데이터의 종류는 도형의 모양(원 vs 사각형)으로 구분하고, 모델의 종류는 색상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또한 실선은 ‘확정된 흐름’을, 점선(Dotted line)은 ‘선택적 흐름’이나 ‘보조적인 연결’을 표현하는 약속으로 사용하면 텍스트 설명 없이도 직관적인 전달이 가능하다.
  • 심미적 완성도를 결정한다.
    • 가령, 투박하고 두꺼운 테두리는 그림을 둔탁하고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든다. 반면 얇고 정교한 테두리는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반면, 너무 얇은 테두리는 배경과 객체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 수 있고, 이는 기능성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적절한 선을 찾아야 한다!)
    • 또한 완전히 각진 사각형보다는 모서리를 아주 살짝 둥글게(1~2pt 정도) 처리하면 훨씬 현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을 줄 수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러한 디테일들이 모여 Figure 전체의 퀄리티를 좌우한다.

전주의적 처리 (Pre-attentive Processing)

색과 모양을 어떤 기준으로 사용해야할까? 그 기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가 시각적 정보를 어떤 과정을 통해 처리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독자의 인지적 노력을 줄이는 것이다. 즉, 중요한 정보는 “한 눈에” 들어와야 한다. 이 “한 눈에 둘어온다”는 것을 인지과학에서는 ‘전주의적 처리(Pre-attentive Processing)‘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의식적인 노력 없이 약 0.2초 만에 특정 시각 정보를 자동 처리한다. 이를 ‘전주의적 처리’라고 한다. Teaser나 비교 실험 결과에서 독자가 꼭 봐야 할 부분은 크기를 키우거나, 분리하거나, 굵게 만들어야 한다. 0.2초 만에 “이게 핵심이구나!”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기술은 ‘빼기’다. 중요한 요소에 힘을 주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은 요소의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요소가 중요하다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래의 방식으로 “힘”을 조절할 수 있다.

  • 덜 중요한 글씨는 연한 회색으로 처리하고, 볼드를 여기저기에 남발하지 말 것.
  • 중요하지 않은 도형, 요소, 혹은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를 위해 추가적인 색상을 넣지 말 것.
  • 정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면, 먼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을 무채색(회색조)으로 만든 뒤 핵심 요소에만 색을 부여해보자.

색상의 위계와 범주

‘색상’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자. 우리는 보통 Figure에 데이터를 표시하게 된다. 색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의 특성과 색상의 특성을 이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데이터는 크게 범주형(Nominal)순서/수치형(Ordinal/Quantitative)으로 나뉜다.
  • 색상은 색조(Hue), 채도(Saturation)명도(Value)로 표현할 수 있다.

위의 특성을 통해, 아래와 같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앞서 말했듯, 색조는 가장 강력한 정보 전달 도구이므로, 아래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Figure의 전반적인 정보 전달 능력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 서로 성격이 다른 대상(Ours vs Baseline, 다른 모달리티 등)을 구분할 때는 색조(Hue)를 다르게 써야 한다.
  • 단, 너무 많은 색조는 혼란을 주므로 메인 테마 컬러 하나에 보조색 2~3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 반면 성격은 같지만 강도나 순서가 다를 때(Heatmap, Layer 깊이 등)는 절대 색조를 바꾸지 말고, 같은 색조 안에서 채도와 명도(Saturation/Value)만 조절해야 한다.
  • 강도 표현에 무지개색을 쓰는 것은 지양하고, 옅은 색에서 짙은 색으로 가는 것이 훨씬 직관적이다.

제시해주신 ‘일관성’과 ‘디테일’ 부분은 논문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마침표와도 같은 단계입니다. 각 항목이 가지는 중요성과 구체적인 실행 가이드를 보강하여 내용을 강화했습니다.

일관성 (Consistency): 논문의 시각적 언어 통일하기

개별 Figure를 잘 그리는 것을 넘어, 논문 전체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일관성이다. 이는 단순히 색깔을 맞추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디자인 언어(Design Language)’를 정립하는 과정이다.

Figure 1에서 입력 데이터를 ‘노란색 정사각형’으로 정의했다면, 마지막 Figure는 물론, 부록(Appendix)과 포스터, 발표 슬라이드까지 그 약속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또한, 화살표의 스타일이 ‘데이터의 흐름’을 의미하는지, ‘연산의 순서’를 의미하는지 한 번 정했다면 그 의미 역시 끝까지 유지되어야 한다.

이 규칙이 지켜질 때 독자는 Figure 1에서 학습한 시각적 규칙을 바탕으로 Figure 5를 별도의 해석 없이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페이지마다 색상 코드나 도형의 의미가 바뀐다면, 독자는 매번 새로운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인지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따라서 논문 집필 초기 단계에 ‘Color Code’와 ‘Symbol Set’을 미리 확정 짓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디테일 요소: 완성도 높이기

앞선 과정들이 “틀리지 않는 논리적 설계”였다면, 이 단계는 독자에게 “전문적인 신뢰감을 주는 마감”의 단계다. 명품과 평범한 제품의 차이가 마감에서 갈리듯, 좋은 논문의 인상은 아주 미묘한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정렬과 여백 (Alignment & Whitespace)

인간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 즉 ‘질서’를 찾는다. 요소들이 미세하게 삐뚤어져 있거나 간격이 불규칙하면, 뇌는 이를 불안정함으로 인식하고 시각적 불편함을 느낀다.

파워포인트나 디자인 툴의 ‘맞춤(Align)’ 기능을 생활화하여 모든 요소를 픽셀 단위로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 또한, 많은 내용을 담고 싶은 욕심에 요소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 것은 금물이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정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요소와 요소 사이, 그리고 텍스트 주변에 일정하고 충분한 여백을 확보해야만 독자가 정보의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타이포그래피 위계 (Typography Hierarchy)

글씨라고 다 같은 글씨가 아니다. 텍스트에도 역할에 따른 명확한 계급(Hierarchy)이 존재해야 한다. 독자가 무엇을 먼저 읽고 무엇을 나중에 읽어야 할지, 폰트의 스타일만으로 가이드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모듈의 이름은 굵고(Bold) 크게, 그에 대한 설명은 중간 크기의 일반(Regular) 굵기로, 그리고 축의 수치나 부가적인 디테일은 작고 옅은 회색으로 처리하는 식이다. 이렇게 시각적 위계를 설정하면 독자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중요한 정보부터 습득하게 된다. 이때 폰트의 크기는 본문 텍스트와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정도가 가장 가독성이 좋으며, 가급적 산세리프(Sans-serif) 계열의 깔끔한 폰트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장식의 최소화 (Less is More)

초심자가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그림이 심심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림자(Drop Shadow), 네온 효과(Glow), 그라데이션, 3D 입체 효과 등을 남발하는 것이다.

데이터 시각화의 대가 에드워드 터프티(Edward Tufte)는 이를 ‘차트 정크(Chart Junk)’라고 불렀다. 잉크는 오직 정보 전달에만 쓰여야 한다. 불필요한 장식은 데이터의 본질을 흐리고 독자의 시선을 분산시킬 뿐이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깔끔한 선(Stroke)과 단색 면(Fill)으로 이루어진 플랫 디자인(Flat Design)을 지향하라. 화려한 꾸밈 효과는 ‘전주의적 처리’를 위해 정말 강조하고 싶은 딱 한 곳에만,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당신의 눈을 믿지 마라 (Iteration)

Figure를 완성했다면 마지막으로 ‘타인의 눈’을 빌려야 한다. 작성자는 이미 내용에 익숙해져(Bias) 있다. 내 눈엔 당연한 화살표가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에겐 암호일 수 있다. 딥러닝 모델이 반복 학습(Iteration)을 통해 수렴하듯, 좋은 Figure도 피드백과 수정이 필수다.

동료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이 그림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뭐가 보여?” “이 그림이 무슨 뜻인 것 같아?”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정답이다. 만약 머뭇거린다면 주저 없이 배치나 색상 단계로 돌아가 수정해야 한다. 지루한 담금질을 견뎌낸 Figure만이 수많은 논문의 홍수 속에서 리뷰어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 좋은 논문은 좋은 글에서 시작되지만, 기억에 남는 논문은 좋은 Figure로 완성된다.